2007 서울대 정시해제
기출해설(논술형)/서울대 2008/08/28 04:55
쉬워 보이지만 어렵다
서울대 논술은 제시문이 쉽다지만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충분한 난이도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질문 형식을 어렵게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주제도 쉽다. 이번 논술의 큰 주제는 세계적 차원의 속도경쟁의 양상에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입니다. 그런데 논제가 묻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의 하위 질문입니다. 이 점이 학생들이 다른 학교의 정시논술과 전혀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세계적 속도경쟁에 발 벗고 나설 것인가, 혹은 저마다의 속도로 발전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한 후에라야 사회 각 영역의 적절한 변화속도에 대하여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처럼 이번 정시문제도 답안의 목차를 ‘매우 불친절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일부 목차를 이용해 자신의 글을 작성하려면, 이해력·논증력·창의력 등 여러 가지 사고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불친절한 목차를 제공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주어진 질문과 <조건>, 자료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묶어내는 종합적 사고력을 직접 논제형식으로부터 측정하려는 의도입니다. 둘째, 2,500자에 달하는 글의 구조를 수험생들이 임의로 작성할 경우 단기간에 일관성 있는 채점이 불가능합니다. 셋째 막연한 글쓰기를 요구하면 내용에 관계없이 긴 글을 많이 써본 학생들만 유리하고 사고력 측면에서는 변별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건>을 만족시킨 답안 가운데 다시 논의의 깊이(심층적 사고)와 넓이(다각적 사고), 독창적 결론(종합력)을 갖춘 글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또 논제 중간에 제시문의 요지를 밝힌 부분은 제시문 독해의 방향을 한정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논제의 모든 구성부분이 맞아 떨어져 하나의 정해진 출제의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논제의 형식적 요구사항만 만족시켜도 상당한 수준의 답안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 논제도 질문과 함께 이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들을 주고 있습니다. 출제자는 <조건> 제시를 통해 글의 전개 과정을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전개과정이 통제되면 대학은 평가요소별로 채점하기가 쉬워지고, 수험생은 출제자가 의도한 전개과정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형태의 시험이 됩니다. 서울대 논술이 어려운 이유는 그런 모색의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건>은 세부문항이다
이번 논제의 <조건>들은 답안의 주요부분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논제의 세부 문항 3개가 주어진 형태입니다. 이렇게 논제가 세부 문항으로 나눠져 있는 경우에 기계적으로 하나씩 답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그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우리 사회 각 영역의 적절한 변화 속도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에 이르러야 좋은 답안이 됩니다. 이 점은 서울대 논제뿐만 아니라, 세부문항의 형태로 출제된 모든 논제에 대하여도 적용됩니다.
단순한 세부문항이 아니라 퍼즐게임
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 단순히 하나씩 답변을 달아가다 보면 일정한 답안이 작성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답변내용이 전체 논제의 출제취지를 파악한 다음에야 다른 세부문항이나 전체 질문에 대한 답변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서울대 논제가 다른 대학의 논제와 가장 크게 다르고 어려운 부분입니다.
연세대·고려대와 달리 서울대는 매년 정시논술의 형식을 지속적으로 혁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울대 논술의 질문을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질문과 <조건>, <제시문>, <보기(예화)> 등 논제의 모든 요소가 서로의 의미를 한정하고 보조해주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험장에서 논제를 읽고 바로 답안의 내용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조건>에 따라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후에야 제시문에 대한 이해, <보기(예화)>의 의미가 자리를 잡게 된다. 답안의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이런 형태의 논제는 마치 그림 맞추기 게임과도 같습니다. 질문과 <조건>에 따라 <예화>와 <제시문>을 오가며 무엇이 쟁점인가를 찾아내는 게임입니다.
비슷한 유형으로는 성균관대 논제가 있습니다. 이제 <조건>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답안을 어떻게 구성할지 생각해봅시다.
2. 풀이
<조건 1>의 해결
여기서는 <조건 1>에 대하여 바로 해설하지만, 사실은 다른 <조건>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방향이 제대로 설정됩니다. 일단 제시문을 봅시다. (가)는 개방화시대에 기업이 투명성을 높이고 국제화할 필요성, 급속한 사회 변화에 따른 가족 형태 변화의 긍정적·부정적 양상, 정부의 규제완화와 전자정부 계획 등 혁신노력을 각각 우리 사회의 변화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계 각국이 지식정보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미국 사회가 영역 간 변화속도의 차이, 특히 정부 영역의 느린 변화속도가 지식기반 시스템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는 취지입니다. 즉,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사회 각 영역의 발전 속도가 함께 빨라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주어진 대로 일단 두 사회의 변화 속도를 비교하는데, 상황은 영역별로 다릅니다. 미국의 가족은 핵가족을 넘어 가족파괴의 상태에 이른 데 반해 우리 가족은 아직 핵가족 단계입니다. 기업은 미국 사회가 훨씬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정부영역은 우리 사회가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가 비판하는 미국사회와는 달리, 우리 사회는 정부가 규제 중심의 관료제를 탈피하여 빠른 속도로 민간 영역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 사회의 변화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가 됩니다.
그런데 과연 영역 간에 속도를 맞추어 앞으로 돌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특히 지식정보화 시대에 정부의 발빠른 대처가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까요? <조건 1>에서는 이런 의문을 떠 올리면 화두를 잘 잡은 겁니다.
분리 되어 있다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 논제를 풀 때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조건 2>와 <조건 3>은 함께 엮어야 그 취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조건 3>이 그 자체로서 세 개의 예화가 사회의 변화 속도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출제오류가 아니라면 예화 3의 내용은 예화 1이나 2와 다른 내용으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전체 질문이 ‘적절한 변화속도’를 묻고 있는 반면에 <조건 3>은 ‘예측’을 요구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조건 3>에 입장이라는 말이 있으니 당연히 예화들이 적절한 변화속도에 대한 주장을 직접 담고 있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한다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논제의 구성요소들이 하나의 논제로 읽히지 않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전했을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조건 2>에 대한 답으로는 사회의 영역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변화하여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예측(예화 1), 같은 속도로 변화함으로써 유리해질 것이라는 예측(예화 2), 그리고 영역 간의 경쟁이 무익한 파국을 불러올 것이라는 예측(예화 3)을 담고 있다고 읽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조건 3>에 대하여는 기업, 가족, 정부의 영역별 변화속도가 서로 달라서 조화를 이룰 것인지(예화 1), 혹은 같아서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예화 2), 혹은 무의미한 속도경쟁만을 반복하다 파국에 이를 것인지(예화 3), 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이유로 들어 보여주면 됩니다.
묻는 걸 묻는 게 아니다
자, 이제 <조건>은 모두 수행했으니, 전체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전체 질문은 적절한 변화 속도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도대체 사회 각 영역의 적절한 변화속도가 뭐가 중요해서 대학입학 논술문제를 통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단 말입니까? 힌트는 <조건 1>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미국 사회의 변화 속도를 비교하라고 한 점에 착안해야 합니다. 세계적 속도경쟁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가야 하는지, 모두 속도를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이 사회 각 영역에게 어떤 혜택과 부담을 주는지를 단계적, 분석적,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아마 다른 학교의 논제였다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세계적 속도경쟁의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논술하시오.’
앞에서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를 영역별로 예측했으므로, 이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쳐 적절한 변화 속도를 주장하면 됩니다. 세 가지 예측 가운데 예화 1, 2는 긍정적 평가를 담고 있고, 예화 3은 부정적 평가를 담고 있으므로 예화 3을 선택했다면 속도경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 됩니다. 반면에 예화 1, 2를 선택했다면 사회 각 영역의 변화 속도가 각각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그로부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면 이에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를 쓰면 됩니다. 그리고 과연 3시간 안에 가능한지는 의문이지만, 가장 큰 주제를 서론에서 문제삼는 방식으로 전체 답안을 재구성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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